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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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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24년 오이타현에서 태어나 어부의 아들로 자랐다. 메이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징집되어 군 복무를 했다. 전후에는 어촌 청년 연맹 사무총장, 오이타현 직원 노동조합 서기를 거쳐 정치에 입문하여 오이타 시의회 의원, 현 의원을 역임했다. 197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일본사회당 국회대책위원장을 거쳐 1994년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에서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재임 기간 중 한신·아와지 대지진, 옴진리교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겪었으며, 일본의 과거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사회민주당 당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기금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활동하다 200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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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94년 공식 초상 사진
이름무라야마 도미이치
원어 이름村山富市
로마자 표기Murayama Tomiichi
출생일1924년 3월 3일
출생지오이타시, 일본 제국
배우자무라야마 요시에 (1953년 결혼)
학력메이지 대학
서명Signature of Tomiichi Murayama.svg
군 복무 정보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44년–1945년
계급군조 후보생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정치 경력
정당사회민주당
이전 정당일본사회당 (1996년까지)
일본 사회당 위원장1993년 9월 25일 – 1996년 1월 19일
사회민주당 당수1996년 1월 19일 – 1996년 9월 28일
수상 경력
훈장동화대수장
명예 박사메이지 대학, 숭실대학교
의회 경력
선거구오이타 1구
임기 시작1972년 12월 11일
임기 종료1980년 5월 19일
임기 시작 (2)1983년 12월 19일
임기 종료 (2)2000년 6월 2일
선거구 (2)오이타시
임기 시작 (3)1963년
임기 종료 (3)1972년
임기 시작 (4)1955년
임기 종료 (4)1963년
총리 재임 정보
직위일본 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국왕아키히토
부총리고노 요헤이, 하시모토 류타로
이전 총리하타 쓰토무
다음 총리하시모토 류타로

2. 생애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24년 3월 3일 오이타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2][3] 그는 11남매 중 여섯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14세 때 돌아가시자 신문 배달과 잡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4] 1938년 오이타 시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로 이주하여 낮에는 인쇄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도쿄 시립 상업학교에서 공부했다.

인쇄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무라야마.


1943년 철학과 학생으로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했지만, 1944년 동원되어 이시카와지마 조선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해 후반에는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제23사단 제23여단 제72보병대에 이등병으로 배속되었다. 일본의 항복 후 장교 후보생 계급으로 제대했으며, 하사 계급의 사관후보생으로 전쟁을 마쳤다. 1946년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했고, 1948년에는 오이타현 어촌 청년 연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어촌 청년 연맹이 수산업 협동조합 설립과 같은 성공을 거두고 해산된 후에는 오이타현 직원 노동조합 서기로 일했다.[5]

전후 정계에서는 내각 총리대신 자리를 놓고 여러 차례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던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주변의 추대에 의해 총리에 취임한 희귀한 존재이다. 무라야마 자신은 "총리대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며, 일본 중 누구도 내가 총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수반 지명 선거에서 선출되면, 내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총리 관저에 독신 부임으로 끌려간 것과 같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 실제로, 비자민 연립 정권의 하타 정권이 좌절하면서 자민당을 포함한 많은 유력 의원들로부터 수상 취임을 설득당했을 때에도 "어느 나라 이야기냐"라고 말하며 고사를 계속했고, 수반 지명 선거에서 자민당이 자신에 대한 투표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을 알지 못했으며, 수면 아래에서 자사사정권 성립에 분주했던 측근 노사카 코켄에게 "내가 당선되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말했다.
  • 자신 인생을 "만남의 인생"이라고 말했다.[104] 욕심 없는 성격으로 오이타 시의회 의원에서 현의회 의원, 중의원 의원, 사회당 위원장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한 것도 "모두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우연과 우연, 만남의 연속으로 주변에서 등을 떠밀려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총리가 된 이상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마음먹었다"라고 말한다. 사회당 위원장과 수상에 취임했을 때 "왜 내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일까"라고 말했다.

2. 1. 어린 시절과 정계 입문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24년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어부의 6남으로 태어났다.[2][3][119] 아버지는 어선을 소유할 정도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지만, 무라야마가 14살 때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4][119] 그 때문에 신문 배달 등을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4][119][38] 1936년 오이타시립 나카시마 심상소학교(현 오이타시립 나카지마 소학교)를, 1938년 오이타시립 오이타 고등소학교(현 오이타시립 가네이케 소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로 가서 낮에는 기계 공장이나 인쇄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도쿄시립상업학교에서 공부했다.[119]

1943년 구제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해 철학 연구부에 소속되었고, 마루타니 가네야스(후에 마루야마 가네야스로 개명)의 권유로 호즈미 고이치가 운영하는 반전 운동 단체(학생 기숙사 "시켄료")에 가입했다.[120][39]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돼 이시카와지마 조선소에 배속되었고, 징병검사를 받고 육군 제23보병연대(보병 제23연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119] 1945년 8월 15일 간부후보생으로서 육군 군조(중사) 계급으로 종전을 맞이한 뒤 복학하여 1946년 졸업했다.[119]

1948년 오이타현 어부청년동맹(어촌 청년 동맹) 서기장이 되었다.[121][40] 어업협동조합 설립 등의 성과를 내고 어업청년동맹이 해산하자 오이타현 공무원 노동조합 서기로 활동했다.[121][5][40] 1951년 오이타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53년 요시에와 결혼했으며, 1955년 오이타시의회 의원 선거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된 후 2선 시의원을 지냈다.[119] 1963년에는 오이타현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돼 내리 3선 현의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119] 1973년에는 요코미치 타카히로와 덴 히데오 등과 함께 "신류 협회(New Flow Association)"에 가입했다.

2. 2. 일본사회당 활동과 국회대책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55년 오이타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1963년 오이타 현 의회 의원을 거쳐 1972년 일본 총선에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6] 1973년에는 요코미치 타카히로, 덴 히데오와 함께 "신류 협회"에 가입했다.[6]

1991년 7월 다나베 마코토가 일본사회당 위원장이 되면서 무라야마는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6] 1992년,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문제, 소위 "PKO 국회"에서 무라야마는 법안 반대의 주요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6] 하지만 자민당, 공명당, 민사당 3당의 연립으로 6월 중의원을 통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자민당의 가지야마 세이로쿠, 공명당의 간자키 다케노리 등 다른 당의 국회대책위원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6]

1993년 1월 야마하나 사다오가 다나베를 대신하여 사회당 위원장이 되었지만, 무라야마는 국회대책위원장직을 유지했다.[6] 같은 해 7월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리크루트 사건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사회당을 포함한 7개 야당이 연립하여 호소카와 내각을 수립, 정권을 교체했다. 야마하나는 정치개혁담당상이 되었으나,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무라야마는 이토 마사토시를 꺾고 위원장에 당선되었으며, 당선 후 구보 와타루를 서기장으로 기용했다.

2. 3. 자사사 연립 정권의 발족과 총리 취임

1994년 4월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날 무렵, 사회당과 연립 정권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있었다. 연립을 이끌던 신생당오자와 이치로는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신뢰하지 않았고, 사회당은 정권을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사회당을 배제하려 드는 오자와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호소카와가 물러난 뒤 연립 정권은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를 총리대신으로 추대했다.

총리 지명 직후, 신생당,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합심하여 사회당을 빼놓은 채 교섭단체 '개신'을 결성했다. 이는 연립 정권에서 사회당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한 목적이었고, 사회당은 이에 반발하여 연립에서 이탈할 뜻을 표명했다.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 정권으로 전락했고, 사회당 내에서는 연립 복귀파와 이탈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6월 25일, 하타 내각은 총사직했다.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는 무라야마에게 접근해 연립 정권의 수반으로 사회당 위원장을 추대하겠다며 자신들과 손을 잡을 것을 권했고, 사회당은 이를 받아들였다. 전직 총리대신인 가이후 도시키가 무라야마를 지지할 수 없다면서 탈당하여 오자와와 손을 잡고 무라야마에 맞섰지만 패배했다. 그렇게 신당 사키가케까지 참여한 자사사 연립 정권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하면서 1947년 가타야마 데쓰 이래 47년 만에 사회당 위원장 출신 총리대신이 탄생했다. 이는 2010년 6월 간 나오토가 총리대신이 되기까지 55년 체제가 출범한 이래 자민당 당적을 가진 적이 없던 사람이 총리대신이 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1994년 7월 20일, 중의원 본회의에서의 무라야마


무라야마 내각은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연립 정부였으며, 때로는 대연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내각은 70년대와 80년대에 제3당이 등장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모든 선거를 지배해왔던 자민당-사회당 갈등을 종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민당, 신당 사키가케, 그리고 사회당은 내각 발족 전에 기본적인 정책 합의에 도달했는데, 이는 해당 내각과 그 뒤를 이은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의 기반이 되었다. 주요 합의 내용은 일본국 헌법 존중, 병립제 및 1994년 일본 선거법 개혁 실시, 세제 개혁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행정 개혁, 일정 조건 하에 소비세 인상 방향 승인, 일본 자위대 및 일미 안보 조약 유지, 유엔 평화유지 활동 적극 참여, 일본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 문제 신중한 처리 등이었다.

무라야마는 총리 취임 후 정책 연설에서 자신의 행정 정책으로 "국민 친화적인 정치"와 "안심할 수 있는 정치"를 희망한다고 밝혔다.[8]

3. 무라야마 내각의 주요 활동



무라야마 내각은 1994년 55년 체제하에서 계속되어 온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자민당·사회당 연립 정부였다.

와타나베 쓰네오는 2000년에 "좋은 의미에서 진보적인 내각으로, 사회당의 반안보·반미, 국가·국기 반대를 없애고 국론 통일의 폭을 크게 넓혀준 것이 최대의 공적"이라고 무라야마를 칭찬했다.[67]

총리대신 취임 후 소신표명 연설에서 무라야마 내각의 시정방침으로 "사람에게 친절한 정치", "안심할 수 있는 정치"를 내걸었다.[68]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맺은 정책 합의에 자유민주당이 참여하여 1994년 6월 「자사사 공동정권 구상」으로 합의되었고, 무라야마 내각,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의 정책 강령이 되었다.


  • 일본국헌법 존중
  • 중선거구제와 비례대표병립제 실시
  • 세제개혁의 전제로서 행정개혁의 단행
  • 조건부이지만 소비세 인상 방향을 인정
  • 일본 자위대와 일미 안전보장 조약 유지
  •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 참가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참가 문제에는 신중히 대처


1994년 7월, 제130회 국회에서 소신표명연설을 통해 "자위대 합헌, 일미 안보 유지"를 언급하며 일본사회당의 기존 정책을 전환했다(후술).

1994년 11월 소비세율을 3%에서 4%로 인상하고 지방소비세 1%를 추가하는 세제개혁 관련 법률이 성립되었다.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한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 당시 일본 정부의 대응 지연이 비판을 받으며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다(후술). 3월 20일에는 옴진리교 간부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했다(후술). 이후 공안조사청의 조사 결과를 존중하여 옴진리교에 대한 파괴활동방지법 적용을 공안심사위원회에 신청했으나(후에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적용은 보류됨),

5월 10일, 자유민주당 간사장 모리 요시로가 "무라야마 총리가 '과도 내각에는 한계가 있다'고 흘렸다"고 발언하며 총리대신 관저에서 무라야마와 나눈 대화를 누설했다. 이 발언을 받아 요미우리 신문이 "총리, 사퇴 의향 누설"이라고 보도하고 다른 언론사들도 이를 뒤따라 대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자민·사민·사키가케 연립정권 전체에서 모리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었고, 내각에서는 무라야마의 유임을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무라야마 내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6월 9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자민·사민·사키가케 3당 공동 제출의 "역사를 교훈 삼아 평화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불전결의)가 가결되었다. 6월 21일, 전일본공수 857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경찰 특수부대에 강행 돌입을 지시하여 진압했다(후술). 7월,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했다(후술). 같은 달,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비자민 총리의 대형 국정 선거로는 자민당이 결당한 1955년 이후 처음이었다. 이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은 의석 수를 크게 줄였기 때문에 무라야마는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여당 측의 유임 요청으로 총리직을 유지하며 내각 개조를 단행했다.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를 각의 결정했다(후술).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했을 당시,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사회당 출신 총리대신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제20회 선진국 정상회의(나폴리 서밋) 이전 회담에서 무라야마가 가난한 어촌에서 자란 자신의 성장 과정부터 정치가를 지망하게 된 과정 등을 조용히 이야기하자, 이를 들은 클린턴은 매우 감동했고, 그 후 서밋에서도 서툰 무라야마를 돕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91] 무라야마의 그때까지 해외 여행 경험은 단 4회에 불과했고, 본인도 불안감을 가지고 참가했지만, 무사히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38]

1994년 7월 20일, 제130회 국회에서의 소신표명연설에서 "자위대 합헌", "일미 안보 유지"를 명확히 언급하며 그동안의 일본 사회당의 정책을 전환하고, 일미안전보장조약 체제를 계속 유지할 것을 확인했다.

이때, 연설 원고에서는 "일미 안전보장체제를 유지"라고 되어 있던 것을, 소신표명연설에서 무라야마가 "일미 안전보장체제를 견지"라고 읽은 것이 주목을 받았다.[92][93][94]

이는 무라야마의 출신 정당인 사회당에게는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상의 없이 결정한 배경 때문에 독단적인 행위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당은 이를 추인했다.

내각관방 부장관을 지낸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는 무라야마 내각에 대해 “국정상 오랫동안 미해결 과제였던 것을 거의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을 한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연금 개혁, 소비세율에 관한 세제 개혁, 邦人 구출을 위한 자위대법 개정, 피폭자 보호법 성립, 미나마타병 대책 해결, 행정개혁법 성립을 들고 있다.[84]

그동안 원전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당 방침에서 전환하여, 국회 답변에서 "전력 수요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의 원자력발전소 건설도 불가피하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스틸캔, 알루미늄캔, 유리병 등의 분리수거 및 재활용 등에 관해 규정한, 포장재재활용법(容器包装に係る分別収集及び再商品化の促進等に関する法律)(용기포장에 관한 분별수집 및 재상품화의 촉진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95]

1991년 11월부터 15회에 걸쳐 개최된 「成田공항 문제 심포지엄」과 이어서 1993년 9월부터 12회에 걸쳐 개최된 「成田공항 문제 원탁회의」의 결론을 받아들여, 무라야마(村山)는 1995년, 지금까지의 공항 문제 경위에 대해 지역 주민들에게 사과했다. 이로 인해 제2기 공사를 위한 용지 매입에 응하는 지주도 나타났다. 그 후, 1996년 미매입지를 피하는 형태로 잠정 활주로를 건설하는 방안이 계획되었다. 무라야마 등 정부의 사과와 더불어 중립 위원들의 거듭되는 노력으로 나리타 공항 반대파 주민들의 강경 자세도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도입에 찬성했다.[96]

오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계기로 무라야마는 문부대신 시마무라 요시노부에게 지시하여 종교법인법 개정안을 제134회 국회에 제출했다. 심의 과정에서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여당 3당이 창가학회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와 창가학회 회장 아키야 에이노스케의 증인 신문을 요구했기 때문에 야당인 신진당, 공명당이 반발했다. 공명당 소속 의원과 구 공명당에 참여했던 신진당 소속 의원들이 참의원 종교법인 특별위원장 사사키 밋푸를 감금하거나 국회의사당에서 피케팅을 하는 등 표결 저지를 시도하면서 국회가 공전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최종적으로 아키야를 국회에 참고인으로 소환한 후 개정 종교법인법을 성립시켰다.

참고로 무라야마는 창가학회의 정치 활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타와라 코타로 등이 창가학회의 정치 활동에 비판적인 "4월회"를 발족시켰을 때, 무라야마는 일본사회당 위원장 자격으로 동회의 설립 총회에 참석했다. 1996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는 총리대신 관저에서 여당 3당 간부들에게 "삼당 연립은 지켜주길 바란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 나라를 창가학회의 지배하에 있는 것 같은 정당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97]라고 말했다. 또한, 무라야마 내각과 무라야마 개조 내각에는 앞서 언급한 시마무라를 비롯하여 카메이 시즈카, 요시노 케이, 사쿠라이 아타루, 다카무라 마사히코, 히라누마 다케오, 노나카 히로무, 오시마 리소 등 창가학회의 정치 활동에 비판적인 "헌법 20조를 생각하는 모임"의 주요 멤버들이 다수 입각했다.

관저에 들어간 무라야마는 내각총리대신, 내각관방장관, 내각관방부장관을 제외하면 총리대신 관저의 스태프는 모두 관료라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꼈다. "관저는 단순히 행정을 하는 청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청이기도 하다" [98]고 생각한 무라야마는 관저 내에 "정치인의 발언과 의견이 조금 더 있어도 좋다" [98]는 이유로 "내각총리대신 보좌"직을 신설했다. 내각총리대신 보좌는 여당 3당에 소속된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하도록 하였고, 나카가와 히데나오, 하야카와 마사루, 니시키오리 준, 토이다 사부로 등을 임명했다. 선임된 내각총리대신 보좌는 총리의 연설 및 답변 등에 대한 의견 제시와 정치 현안에 대한 정보 수집을 담당했다. 이 내각총리대신 보좌직은 총리의 사적인 고문 역할이었지만, 이후 내각법이 개정되어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직이 법제화되었다(내각법 제19조).

탈원전 활동을 하고 있는 무라야마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전 총리 4명과 함께, EU의 집행기관인 유럽 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에게 EU 내 원전 반대를 촉구하는 서한을 2022년 1월 27일자로 보냈다. 그러나 서한 속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으로 아이들이 갑상선암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기술에 대해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각계에서 제기되었다.

야마구치 츠요시 환경상은 "(현 및 국제연합의 전문가 조사에서) 현재로서는 방사선의 영향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의 평가가 나왔다."며 "근거 없는 차별과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항의했고, 우치보리 마사오 후쿠시마현 지사도 "후쿠시마 부흥을 위해서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정보 발신이 매우 중요하다. 객관적인 발신을 부탁드린다."며 무라야마 등에게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여야 의원들이 무라야마 등을 비판했고, 특히 자민당은 무라야마 등에 대한 비난 결의를 채택할 태세를 보였다.[99][100][101][102]

한편, 무라야마 등은 시민단체를 통해 야마구치 환경상과 우치보리 지사에게 반대로 항의하며 질문서를 보냈다.[103]

3. 1. 무라야마 담화 발표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95년 8월 15일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 각의 결정에 근거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9][69] 이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에 행했다고 생각되는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한 것이다. 이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견해로 이해되고 있다.[9]

무라야마는 총리 취임 직후 ASEAN 국가들을 순방하며 "아시아 국가들은 표면적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제 대국이 된 국가들이 다시 군사 대국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꼈다고 한다. 이에 1995년 6월 9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무라야마 담화 채택이 결정되었다.

관방장관 이가라시 고조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무라야마의 과거 연설 내용을 통합하여 성명서를 초안했다. 무라야마가 성명서 초고를 완성한 후 하시모토 류타로와 일본전몰자유족회 회장에게 보여주었다. 문서의 "전쟁 종결"과 "패배"에 대해 처음에는 갈등이 있었지만, 패배가 이후 국민 통합의 기반이 되었다는 데 합의했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는 "사회당 위원장 출신 총리가 이 정도 수준의 성명도 발표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며, 반대가 있을 경우 총리직 사퇴를 각오했다고 한다. 노사카 고켄 신임 관방장관은 성명에 반대하는 내각 구성원은 즉시 해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각료회의에서 후루카와 데이지로 부관방장관이 성명을 낭독했고, 모든 각료가 반대 없이 성명에 서명하여 내각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무라야마 담화 발표 당시 무라야마는 "당연한 것을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70] 그는 자신의 후임인 하시모토 류타로가 이 담화를 완전히 존중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후 모든 내각은 담화를 존중할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10][11][71]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가 취한 공식적인 역사적 이해로 간주된다.[9][69]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5년 종전 60주년에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12][75]

그러나 보수 정치인들은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부인 등 담화와 다른 의견을 표명해 왔으며, 이 때문에 한국중국 정부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2008년 11월, 항공자위대 사령관 다모가미 도시오는 "일본은 침략국가였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가 아소 다로 총리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고 해임되었다. 아베 신조는 총리 취임 전 무라야마 담화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었지만,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아베 내각은 무라야마 담화를 포함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밝혔다.[13][77]

무라야마는 오랄 히스토리에서 "원래 일본 국내에는 과거 전쟁이 옳았는지 그릇되었는지 명확한 통일된 견해가 없었다"며,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여 전후 50주년을 맞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중국 등에서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도 있다고 지적되면, 일본은 사상, 언론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무라야마 담화를 지지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대답하고 있다"고 말했다.

3. 2. 한신·아와지 대지진 대응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이 발생했을때,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은 대응이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다.[4] 특히 일본 자위대 파병 지연에 대한 질문에 "아무래도 처음 있는 일이라서"라고 답변하여, 온후한 이미지로 비교적 친근하게 여겨져 온 무라야마 총리에 대한 비판여론이 강해졌고, 내각 지지율도 급락했다.[38] 결국 지연된 대응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법률 제도를 포함한 당시 일본 정부의 위기 관리 시스템의 부적절성이 드러났다.

한신 고속도로(阪神高速道路)


지진은 오전 5시 46분경 발생했지만, 당시 총리 관저에는 위기 관리 담당 직원이 없었다. 또한 재해 대책을 관할하는 국토청에도 당직자가 없었다.[15] 내각부와 관료들의 연립 내각에 대한 충성심이 낮은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지진 후, 고토다 마사하루의 지시를 받은 사사 아쓰유키는 내각에 위기 관리에 대한 강연을 했다. 사사는 무라야마가 내각 구성원 중 유일하게 강연 내내 주의를 기울였고, 다른 각료들의 부주의한 태도를 질책했다고 적었다. 사사는 또한 무라야마가 지진 직후 기자 회견을 열려고 했지만 내각부 관료들에게 저지당한 일화에 대해서도 적었다.[15]

무라야마 자신은 "현재의 위기 관리 시스템이 있었다면 초기 대응을 더 신속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것에 대한 수치심을 견딜 수 없습니다. 매년 1월 17일 아침에는 집에서 묵념을 합니다."라고 말했다.[16] 또한 "위기 대응 기능이 전혀 없었습니다. 초기 대응 개시 지연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대응 실패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17][18]

당시 일본 역사상 최장수 내각부총리관방장관직을 총리 관저에서 역임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이 전례 없는 재난 속에서, 미성숙한 법률 제도 하에서 무라야마 이외에 누가 총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대응은 불가능했습니다."라고 말했다.[19] 반면 그는 "멀리 보면 (내각이 즉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스템 부재의) 원인은 사회당에 있습니다. 사회당은 계속해서 내각의 권한 강화에 반대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사회당 출신 총리가 위기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20]

일본의 법 체계 때문에 일본 자위대는 효고현 지사 가이하라 도시타미의 현지 요청 없이는 파병될 수 없었다. 당일 오전 8시 10분, 일본 방위성과 육상자위대 히메지 주둔지는 효고현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오전 10시 이전에 자위대 헬리콥터가 재해 지역 정보 수집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카이하라는 그 이후에야 방위청에 합류했고,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국 카이하라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효고현 재난방지 담당 의원이 오전 10시 10분에 파병 요청을 발표했고, 자위대는 4분 후인 오전 10시 14분에 파병되었다.

2007년,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한신 대지진 당시 지도자들의 결정(자위대 파병에 대한) 지연으로 인해 2,000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21] 이에 대해 카이하라는 "이시하라 씨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위기 관리 측면에서 후회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요청 지연으로 사망자 수가 증가한 것은 아닙니다. 사망자의 80% 이상은 거의 즉시 압사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병 지연과 사망자 수 증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진 후 효고현 재난방지 담당관으로 취임한 사이토 토미오는 이시하라의 발언이 "전적으로 근거 없는 발언이며 매우 유감이다"라고 주장했다.

지진 직후, 무라야마는 국토청 장관 오자와 키요시를 대신하여 고사토 사토시를 지진 대책 담당 장관으로 임명하여 부흥 대책의 총지휘를 맡겼다. 또한 시모카와베 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진 부흥 위원회를 조직하여 부흥 방안의 수립을 진행했다. 피해자 지원으로 16개의 법률을 개정 및 제정하여 피해자에 대한 세금 부담 경감 등을 도모했다.

3. 3. 옴진리교 사건 대응

긴급 구조대가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공격에 대응하는 모습


1995년 3월 20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했다.[90] 무라야마는 법무대신 마에다 이사오,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노나카 히로무, 경찰청장관 쿠니마쓰 코우지, 내각관방장관 이가라시 히로미 등 관계 간부들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건 수사에 대해 "관련 없는 혐의로 체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형사 수사의 옳고 그름에 대해 정치적 측면에서 매우 문제가 되었다.

옴진리교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파괴활동방지법의 적용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며, 공안조사청은 이 극단적인 종교 집단에 대한 징계 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공안심사위원회는 파괴활동방지법 적용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신청을 보류했다.

1952년에 공포된 파괴활동방지법은 폭력주의적 파괴활동을 한 단체에 대해 규제 조치를 규정한 법률이다. 당초 일본 공산당이나 일본 적군 등 폭력혁명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는 극좌 세력의 확대를 방지하는 목적도 있었다. 1955년 체제 하에서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들은 이 법 적용에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해왔다. 오움진리교에 대한 파괴활동방지법 적용에 대해서는 경찰 관료 출신인 자민당의 고토다 마사하루 등으로부터도 이견이 제기되는 등 찬반 양론이 격렬했다. 그러나 법무대신 미야자와 히로시, 국가공안위원장 노나카와 협의한 무라야마는 공안조사청의 조사를 존중하기로 결정하고, 공안심사위원회에 처분 요청의 길을 열었다. 지하철 사린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관련 없는 혐의로 체포" 처리에 대한 발언은 자유주의 계열로 동지적인 측면이 강한 인권변호사들로부터도 큰 반발을 받는 등 찬반 양론이 엇갈렸다.

2007년 3월 17일,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모임」이 편찬한 『나에게 있어서의 지하철 사린 사건』에 수기를 기고했다. 이 책에는 언더그라운드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 등도 기고했다.

전일본공수 857편 납치 사건

1995년 6월, 하네다발 하코다테행 전일본공수 857편(승무원 승객 365명)이 납치당했고, "사린을 소지하고 있다"는 범인이 체포·구류되었던 오무진리교 교주 마사하루 아키후미(麻原彰晃)의 석방을 정부에 요구했다. 무라야마는 국가공안위원장 노나카와 운수대신 카메이 시즈카(亀井静香)와 협의하여 납치범과의 협상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하고, 경시청 경비부 제6 기동대 특과중대(Special Armed Police, 통칭 SAP) 투입을 지시했다.

SAP에 돌입을 지시한 후, 무라야마는 "만약 사망자가 발생하면 백장포를 입고 유족에게 사과하러 갈 각오다"라고 발언했고, 노나카는 "그럴 경우 저도 동행하겠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기내 상황에 대한 수집 정보로부터 범인이 오무진리교 신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시청 경비부 제6기동대 특과중대(SAP)는 돌입에 참가하지 않고 후방 지원으로 돌아서, 홋카이도 경찰 본부 기동대 대총기 부대와 하코다테 중앙서원의 돌입을 지원했다. 범인을 체포했고 경상자 1명이 발생했다. 사린으로 여겨진 물질은 단순한 물이었고, 납치범은 오무진리교와는 전혀 무관한 정신 질환으로 휴직 중이던 동양신탁은행(현·미쓰비시 UFJ신탁은행)의 행원이었다.

당시 경찰청은 특수부대인 SAP의 존재 자체를 극비로 하고 있었고, 실전 투입 후에도 그 존재가 공개되는 일은 없었다. 1996년, 경찰청은 홋카이도 경찰본부, 지바현 경찰본부, 가나가와현 경찰본부, 아이치현 경찰본부, 후쿠오카현 경찰본부에 부대를 증설하고, 경시청, 오사카부 경찰본부의 SAP와 함께 공식적으로 "특수 급습 부대"(Special Assault Team, 통칭 SAT)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정규 부대로 공표했다.

3. 4.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설립

1994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민간 기금에 의한 위문금 지급 구상을 발표했다.[78] 1995년 7월, 총리부외무성 관할하에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했다.[78] 이를 통해 1997년 1월, 처음으로 한국인 위안부에게 위문금을 지급했다.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하기 이전에 국비를 이용한 손해배상이나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을 때 이러한 문제는 해결이 완료되었다는 입장으로 국비를 이용했는데 위안부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무라야마의 구상에서는 정부가 기금을 설립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민간의 지원으로 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국비의 투입을 피하는 동시에 모금에 의한 국민의 진지한 생각이 표현되는 것으로 양자의 주장을 포함하면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무라야마는 설립 배경에 대해 "'정부 배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전시 배상은 법적으로 해결되었다. 이제 와서 다시 다룰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국내외적으로 의견 차이가 크고, '나는 제대로 배상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14][78] "여당 3당 사이에서도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78] "그것을 극복하고 일치점을 찾아 기금 설립에 이르렀다."[78]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살아생전에 일본 국민으로부터 사과의 뜻을 전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신 분들의 명예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78]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14][78]라고 설명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의 초대 이사장으로는 하라 분베에(原文兵衛)가,[78] 2대 이사장으로는 총리대신에서 퇴임한 무라야마가 취임해 6억여 엔의 모금액을 이용해 위안부 피해자의 생활 지원과 함께 여성의 명예 및 존엄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해 왔다.[78] 필리핀, 대한민국, 타이완 등에서 지원사업을 전개했으며, 인도네시아 사업이 종료될 것으로 예정된 2007년 3월에 해산하기로 발표되었다.[78]

2000년 9월 1일, 제2차 모리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에 관한 기자 회견을 열고, 해당 기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식을 재차 표명하였다.

2007년 3월 6일, 무라야마는 기자 회견을 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서 심의되고 있는 것에 대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통해) 역대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 편지를 보낸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라고 발언하였다.

3. 5. 한일병합에 대한 발언 논란

1995년 8월, 무라야마는 한일병합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종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고 그동안 사회당 위원장으로서 침략 전쟁 인정과 과거 사죄에 앞장서 온 무라야마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148][149] 이런 발언에 대해 당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150] 당시 무라야마의 이 발언에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었고 양국의원연맹 합동총회가 연기되는 등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151][152][153]

무라야마는 또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공식석상에서 한일병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받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병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1995년 6월 전 외무상 와타나베가 지방에서 한 강연을 통해 한일병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은 것이 한 예이다. 무라야마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154]

무라야마는 17일에도 한일병합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는 참의원 예산위원회 답변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병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그러나 무라야마는 정치적·도의적 실태론으로 판단하면 한일병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데 대해 우려한다고 말했다. 무라야마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무라야마는 지난 5일 한일병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155]

그러다 11월 19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영삼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156][157][158]

4. 총리 퇴임 이후 활동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총리 퇴임 후에도 사회민주당(사민당) 당수직을 유지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42] 1996년 사민당 당명을 변경하고 초대 당수가 되었으나, 소속 의원들의 민주당 이탈로 당세가 약화되었다.[42]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8선에 성공했지만, 사민당은 15석으로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42]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은 제2차 하시모토 내각 출범 이후 각외협력으로 전환되었고, 1998년 사민당의 정권 협의 파기로 종말을 고했다.[42] 1999년에는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안에 반대표를 던졌고,[43] 같은 해 중국 건국 50주년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했다.[124][43] 또한, 노나카 히로무 등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도 했다.[44]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사망 당시 중의원 본회의에서 추도 연설을 했으며,[44] 같은 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이사장을 맡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기금은 2007년 해산되었다.[34][35]

2005년에는 교토 영빈관 개관식에 참석했고,[38] 같은 해 오이타시에서 운전 중 접촉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125][119][46] 2006년에는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126][45]

2009년과 2015년에는 중국 건국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했다.[124][43][59] 2013년에는 일중 우호협회 명예단장 자격으로 방중하여 탕자쉬안 중일우호협회 회장과 회담했고,[127][47] 아베 신조 총리에게 회담 내용을 보고하며 무라야마 담화 노선 변경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128][48]

2014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무라야마 담화의 의의를 강연하고 정홍원 국무총리와 회담하는 등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53] 같은 해 숭실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133][53]

2015년 오이타현지사 선거에서는 자민당 후보를 지원했다.[134][135][136][56][57][58]

2020년 사민당 분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며,[138][60] 고령을 이유로 사민당 명예 당수 및 고문직에서 물러났으나 당원 자격은 유지했다.[139][140][61][62]

2021년에는 입헌민주당 대표 에다노 유키오와 회담하며 격려했다.[141][142][63][64] 2022년에는 중의원 의원회관 이벤트에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143][65]

2024년 3월 3일,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어 세 번째로 100세를 맞이한 일본 총리가 되었다.[36][66]

오카베 요시히코와 함께 (2015년 11월)

5. 평가 및 영향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일본 사회당 내에서 우파로 활동했지만, 무라야마 내각 성립 이후 언론은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사회당 우파', 지지 세력을 '사회당 좌파'로 칭하며 혼선이 있었다. 무라야마 내각에 참여한 하마모토 만조, 오데 다카시, 야마구치 쓰루오 등은 모두 사회당 우파에 속한다.

무라야마는 탈원전 활동을 하며 2022년 1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전 총리들과 함께 EU의 유럽 집행위원회에 EU 내 원전 반대 서한을 보냈다.[99][100][101][102] 그러나 서한에 포함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으로 아이들이 갑상선암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은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99][100][101][102] 야마구치 쓰요시 환경상과 우치보리 마사오 후쿠시마현 지사는 과학적 근거 부족과 차별 조장 우려를 제기하며 항의했고,[99][100][101][102] 여야 의원들도 비판에 가세했으며, 자민당은 비난 결의를 채택할 태세를 보였다.[99][100][101][102] 이에 무라야마 등은 시민단체를 통해 야마구치 환경상과 우치보리 지사에게 반박하며 질문서를 보냈다.[103]

무라야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의 추대로 총리가 된 특이한 경우이다. 그는 총리가 될 생각이 없었으며, 비자민 연립 정권의 하타 정권 붕괴 후 많은 유력 의원들의 취임 설득에도 "어느 나라 이야기냐"며 고사했다. 수반 지명 선거에서 자민당이 자신에게 투표할 것을 알지 못했고, 연립정권 성립에 힘쓴 측근 노사카 고켄에게 "내가 당선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만남의 인생"이라 칭하며,[104] 욕심 없는 성격으로 총리직을 맡게 된 것도 우연과 만남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한다.

총리 재임 중 가메이 시즈카, 노나카 히로무 등 자민당 내 강경파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은 이후에도 무라야마를 최고의 총리로 칭송했다. 그러나 "자위대의 합헌성"이라는 사회당의 오랜 정책을 전환해야 했고, 한신·아와지 대지진, 옴진리교 사건 등 대사건이 빈발하여 퇴임 후 수면제를 복용하며 직무를 수행했다고 보도되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선진국 정상회의 참석 전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에게 조언을 받았으며,[105] 총리 재임 중에는 동갑인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가 좋은 상담역이 되어 주었다. 베트남 요인과의 회담에서 "일본 덕분"이라는 사교례에 "당신들이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존경심을 얻었고, 퇴임 후에도 베트남을 방문했다. 정상회의 개최 전 복통과 설사로 고생했는데, 이는 웨이터가 건넨 복숭아 주스를 마신 탓이었다.[106] 하치만 가즈오 등은 외무성의 건강 관리 부족을 비판했다.[106]

무라야마는 자신의 정권 운영에 반성이 있다면서도, 민주당 정권을 최악으로 평가하며 노다 요시히코 내각의 소비세 증세 방침을 비판했다. 납치 문제 해결 전이라도 인도적 지원은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톤짱'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107] 사회당은 '톤짱 인형'을 발매했다.[107] 해외 언론에서는 '토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무라야마 이후 부모가 정치인이 아닌 총리는 2010년 간 나오토까지 없었다.

재산공개제도 시행 이후 역대 총리 중 재산이 최저였고,[108][109] 서민적 이미지로 정계 은퇴 후에도 검소하게 생활하며 자전거를 이용했다. 여름 휴가 계획에 "연중무휴 어부 출신이라 필요 없다"고 거절했으나, 설득 끝에 고급 여관에서 휴가를 보냈다. 긴 눈썹이 트레이드마크이며, 마쓰무라 구니히로가 눈썹을 자르는 방송 기획에 동의했다. 2007년 마쓰모토 분로쿠 후보가 무라야마와 함께 찍은 선거 포스터를 게시하여 참의원 비례대표 출마 문의가 오기도 했다.[110]

키는 173cm로 당시 기준 장신이었다. 장녀는 마리(1955년생[111]), 차녀는 퍼스트 레이디를 지낸 나카하라 유리[112]이며, 손자가 두 명 있다.[113] 오이타시 자택 옆이 지요우미 류지의 친가이며, 어린 시절 무라야마에게 격려를 받았다.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선거 결과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1년 통일지방선거오이타현 오이타시 시의회 의원일본사회당낙선
1955년 통일지방선거오이타현 오이타시 시의회 의원일본사회당당선
1959년 통일지방선거오이타현 오이타시 시의회 의원일본사회당당선
1963년 통일지방선거오이타현 오이타시 현의회 의원일본사회당당선
1967년 통일지방선거오이타현 오이타시 현의회 의원일본사회당당선
1971년 통일지방선거오이타현 오이타시 현의회 의원일본사회당당선
1972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93,256표22.4%1위당선중선거구
1976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2,307표24.0%1위당선중선거구
1979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86,736표19.2%1위당선중선거구
1980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69,466표14.5%5위낙선중선거구
1983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21,919표25.9%1위당선중선거구
1986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7,988표22.5%1위당선중선거구
1990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8,343표22.2%1위당선중선거구
1993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6,260표23.8%1위당선중선거구
1996년 총선거중의원 의원, 오이타현 제1구사회민주당106,258표59.5%1위당선소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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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뉴스 '망언'잘못 시인 https://newslibrary.[...] 2014-10-11
[157] 뉴스 "日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대통령 "韓國民고통에 깊이사과"무라야마 韓·日정상회담 https://newslibrary.[...] 2014-10-11
[158] 뉴스 韓-日 정상회담「과거사妄言 갈등」일단 봉합 https://newslibrary.[...] 20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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